아침 기도 시간에 보통 늦어 그날 드릴 기도를 다 마치지 못해 교회 앞길을 걸으며 다 못한 기도를 할 때가 많다. 많은 고민으로 밤잠을 자기 어렵고, 나이가 들고 몸도 같이 늙어가니 추해지고 낡아진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나을성싶도록 몸이 거추장스럽다. 근육 수축으로 뻣뻣한 목과 등의 긴장을 덜어보려고 몸과 고개를 굽히고 걸었다. 좁고 깊은 인공 배수로에 맞닿아 있는 넓지 않은 길은 지반이 약한지 약간 기울어지고 아스팔트가 제법 많이 깨어져있다. 그러다 문득 산뜻한 초록색 빛이 침침한 눈으로 들어왔고 순간에 어둡던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 깨진 아스팔트 좁은 틈 사이로 이끼보다 조금 큰 식물이 콩나물 자라듯 빼곡히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도 생명을 피워내는 그들이 안쓰럽고 존경스럽기도 하여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인간에겐 가소롭지만 그들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러울 잡초의 세계를 따라 걸었다.
아기들과 부모들과의 웃음과 주변에 싱그런 꽃과 나무와 공중의 새들이 날아오르고 지저귀는 소리가 있는 세상에서 각각의 종들이 생명을 만끽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그것들이 비록 찰나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그림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최근 가장에 의해 살해당한 다섯 식구의 얘기가 떠올라 내 몸의 피가 검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바가 있다. 부자간에 모녀간에 고부간에 다툼이나 불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종 부모나 남편 아내와 자녀들이 가장 믿고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극한 살인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들 각자가 검을 주려고 오신 주님의 검을 받아 잠깐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가장의 부모님이 예수를 믿어 아들과 며느리와 손녀들이 원수로 여길 정도로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하며 예수를 전했다면 잠깐 동안은 화평치 못했으나 그 가정에 진정한 화평이 왔을 것이다. 영원한 화평이신 예수 안에 들어오려면 잠깐의 불화를 감당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부모의 대에서 실패했더라도 그나 그의 아내나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했다면 그토록 무모한 희생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족 중에 한 사람도 주 예수의 검을 받아 죄와 사망을 잘라내지 않았던 같다. 결국 가장은 고작 사업 실패로 자기의 부모와 아내와 삶의 기대에 차있을 청년의 두 자녀를 죽이는 가장 비정한 자식이요 아비가 되었다.
아스팔트 틈이라도 마다않고 자기들의 세계를 이룬 작은 풀, 확대경으로나 볼 수 있는 풀 만도 못한 삶으로 세상을 떠나 생명의 기회를 영원히 잃은 그런 이들이 너무 안타깝다. 예수를 믿고 영접할 시기를 놓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웃에 불편을 끼치지 않은 것이 요즘 사회가 합의한 덕목이요 정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후는 인간의 원수인 마귀이다. 결국 마귀의 수족이 된 자나 마귀에게 진자들의 영혼은 멸망하고 만다.
김기동 목사님은 계시록 16:13-14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공산 사회주의 정부, 공산 사회주의 경제 체제, 공산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방송매체라 하셨다.
공산 사회주의 정부의 거침없는 살인, 거짓, 통제, 인권 침해, 법을 빙자한 헌정 유린은 물론 입에 풀칠할 정도의 기초 생활 보장을 약속하는 통제 경제체제가 또 그것을 정당화하는 매스 미디어가 창궐하는 사회로 온 세계가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로 보통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다. 생명과 인권을 비웃고 무시하며 짓밟는 마귀의 일에 최적화된 사회는 공산주의 파시즘 사회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범죄가 되고 마귀가 원하는 대량학살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물어가는 세상이 깨진 아스팔트 틈과 같을지라도 우리 대한민국이 그곳을 가득 채운 들풀처럼 소생하길 기도해야 한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있어도 성령 훼방을 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 예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우리가 기도해야만 한다.
2025년 4월 27일
담임목사 고 정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