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높은 봉급을 받는 40명 정도의 간호사들이 거의다가 십일조와 헌금을 하니 헌금 액수가 제법 많았다. 평신도인 나는 성물에 대해 두려움까지 있어 모임 운영 시 필요한 경비는 감동될 때 서로 조금씩 내서 충당하고 모아진 헌금은 일원도 손대지 않고 전액을 서울 성락교회로 매달 보냈다. 두 번째 사우디에 갔던 4년 가까이 어김없었다.
이 평신도 사역에서부터 목사가 된 현재까지 40여 년간 누구에게도 돈이 필요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내 개인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에서 필요한 것도 어느 누구에게도 헌금을 해달고 부탁한 적이 없다. 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권하는 거 외에 교회 재정이 바닥이 나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자원하여 헌금을 드려야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그들 나름대로 체험할 수 있고 교회는 명쾌한 위엄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 나의 목회철학이다.
성도들이 복을 받도록 헌금을 하게 하거나 목회자들을 대접하게 하라는 얘기도 듣지만 나는 주님의 교회나 주의 종들이 구차해지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주의 종이라 여겨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이 있을 때는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일 쓸 돈이 없어도 오늘 대접해야 할 때 대접을 해야 평안한 성격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큰 복중에 하나이다. 고교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마친 후에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개척했다. 그러나 내가 혼자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부터 그분의 도우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집안을 돌보다 오 년이나 늦게 부산에 있는 여학교에서 사감 노릇을 하며 간호대를 다닐 때는 장학금을 못 받으면 자신의 금반지나 목걸이를 빼서 학비를 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인도네시아로 초청한 선교사 부부가, 나와 L목사님 교회에서 온 두 친자매 선교사를 반은 쫓아내고, 반은 우리가 도저히 못 견뎌서 나오게 됐을 때,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과 돈이 있어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항공권이 있을 리 없었고 친구들이 좀 모아준 돈도 그 선교사님 교회에 다 헌금했었다. 남은 것은 한 달 정도의 비자 체류 기간 잠만 자는 숙소 임대 기간이 두 달 남았고 그리고 내가 무일푼임을 알고 있는 그 두 자매가 주고 간 50불이었다.
그때 내 친 오빠가 인니에 사업상 왔었지만 나는 내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 누구에라도 얘기하면 돌아갈 항공권이라도 보내주겠지만 말하지 않았다. 인니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왔다고 알고 있어 내 맘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95년 1 달러는 2200 루피아로 50불은 110,000루피아였다. 30년 전이라도 110,000루피아로는 뭘 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당시 하급 노동자 월급의 1/5 정도였다. 그것으로 몇 달을 버터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3-4개가 한 봉지인 바나나 튀김으로 하루를 때우는 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극도로 마르고 허약해졌다. 버스비도 아껴야 했다. 기운 없는 몸은 뜨거운 햇빛에 촛대처럼 녹아 흔들 흔들 걸어 다녔다.
인니어는 ‘슬라맛 빠기’ 아침 인사 한마디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만 아셨다.
2025년 6월 8일
담임 목사 고정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