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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25-28

웰빙(Well being)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웰빙이란 말이 온 사회의 화두가 되어 떠들썩한 지 오래다. 먹을 것이 없어 한 끼 채우기도 어렵던 지구 주민들 가운데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택한 나라의 시민들은 배고픔을 채우는 것을 넘어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을 찾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며 무엇이든 극단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 덕분에 웰빙이란 말로 포장된 제품시장이 미국과는 떨어지지만 일본과는 실질소득을 앞지르며 고소득 국가로 진입하였고 미국 일본과 비슷한 소비의 고급화 다양화에 달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반면 공산 사회주의와 봉건주의 세습체제를 혼합시켜 지구상에 출현한 적이 없는 체제를 구축한 북한은 세계 역사상 가장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체제하에 최악의 빈곤 집단으로 선두를 다투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 집단은 몇천 년을 같은 종족과 언어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였으나 각기 다른 체제를 선택한 최근 70년 세월의 결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회가 되었다.

웰빙이란 말은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나 행동’이라고 한다. 건강 중심의 웰빙은 단순히 질병 없는 상태를 넘어 균형 잡힌 식생활과 운동 스트레스 해소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 맥락의 웰빙은 가족, 일 휴식 간의 균형을 강조하며 현대사회 물질주의 비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믿는 자의 웰빙은 무엇인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며 남에게 복음 전파를 한 후 오히려 우리 자신이 버림이 되지 않도록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고전 9:23, 9:27).

반면 웰다잉(Well dying) 이란 말이 있다.
곧 ‘잘 죽는다’는 뜻이다. 생과 사는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피조계에 두신 대전제이며 질서이다. 잘 죽는 일은 잘 사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죽음을 나와 관계없는 것 또는 아주 먼 날의 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매우 위험한 것이다.

어떤 묘비명은 ‘나도 당신처럼 거기에 서있었다. 나도 당신처럼 거기에 웃고 서있었다.’ 라고 남겼다.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남겼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죽음의 준비는 빨리할수록 좋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의 계획대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예상외의 순간에 예상외의 형태로 온다. 수상록에서 몽테뉴 (Montaigne)는 ‘죽음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내게 남은 시간이 장구할 거라는 착각 때문에 게으르고 욕심을 부리며 정직하지 않고 슬그머니 불의를 받아들인다. 샛별처럼 심령에 떠오르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매사에 ‘번민’이란 말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예’ 또는 ‘아니요’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예’를 하자니 육신의 정욕이 많은 핑계를 대며 항의하고 나 역시 그 핑계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손을 들어주고 싶으니 번민이 오며 머리가 쑤셔온다.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처방은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 곧 죽을 것이라 인정하라. 그러면 번민이 해결될 것이다.’ 따끔하게 말한다. 이렇게 세상도 잘 죽으려는 고민을 한다. 그리고 극한상황에서도 선을 추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온다. 위대한 죽음을 죽으라 권유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이타심을 보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라 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다. 위대한 죽음을 죽을 자신이 없다. 노력은 하겠지만 말이다.

다만 벌거벗겨 나무에 달린 강도 같이, 벌거벗고 나무에 매달린 나사렛 예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했던 그 믿음과 영감이 지속되어 거저 받은 피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을 소망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를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고백할 때 그것을 의롭다 하시고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길 소망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웰빙이며 웰다잉이다.

2025년 7월 13일
담임 목사 고정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