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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25-29

내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강제 출국을 당하고 토론토 캐나다 친구의 집에서 몇 달 있던 때였다. 이왕 근처까지 왔으니 미국을 조금이라도 봐야겠다 하여 나이아가라 폭포 쪽의 육로 국경을 넘어 워싱턴 DC나 뉴욕 같은 곳을 2박 3일간 볼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이다. 그 중앙 벽에는 ‘Freedom Is Not Free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두 명의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부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도 그 유명한 글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참전 용사의 후손일 수도 있었다.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석판에는 사망자와 실종자의 명단이 끝이 없을 정도로 새겨져 있었다.

1950년 6월 -1953년 7월 휴전까지 3년간의 전쟁 피해는 가히 비극이었다. 한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군 93만, 민간인 피해 250만, 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총인구 3000만 인구에서 1900만 명이 피해를 입은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투와 의료 등의 지원을 해주었던 22개국의 유엔군은 16만 명이 사상, 실종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미군 사망자는 36,000, 부상 103,000, 포로 7,000, 실종 8,177명이었다고 한다.

과연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전쟁 발발 오 년 전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36년 만에 일본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에 의해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대한민국과 북한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호시탐탐 적화를 노리던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협조와 지지 하에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선전 포고 없이 기습 남침했던 것이다. 이렇게 소련과 중공의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 야욕은 북한의 대리전으로 일부 실현되었다.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하고 파죽지세로 공격당했지만 7월 1일 급속도로 유엔군이 합류하면서 점차 승세를 잡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려나 대한민국의 숨이 끊어질 순간 유엔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전사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됨으로 삼 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의 북쪽 끝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북한 해방의 눈앞에서 50만 중공군이 투입되는 되는 바람에 한반도는 다시 두 동강이 나고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의 두 정부로 고착되고 말았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70년의 긴 휴전 하에 남북 대치는 한반도에 끊임없는 갈등과 혼란의 원인이며 대한민국은 북한 괴뢰집단의 끈질긴 테러와 살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내가 워싱턴 DC에 갔던 날은 유엔 참전 용사들의 기념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휠체어에 혹은 팔다리가 상해 보조 기구를 사용하는 백발의 노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짧은 영어로 그들의 손을 붙잡고 감사함을 전했다. 가난하고 미개한 극동의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 젊은이들, 아침 이슬처럼 아름답던 그들이 잡풀 속에 파묻혀 죽어 갔다. 마지막 기도를 하거나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그 귀중한 목숨을 남의 나라 땅에 쏟았던 것이다.

나는 이 은혜를 베뢰아 실천으로 갚고 싶다.

2025년 7월 20일
담임 목사 고정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