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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25-30

나이가 칠십이 되어 뒤돌아보니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다행히 지금까지 견뎌낸 것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 예수를 알기 전부터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내 삶의 변곡점마다 귀한 인연을 주셨기 때문이다.

1995년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 입국한 이후 약 두 달 만에 같이 일하기로 한 선교사 부부와 헤어졌다. 남아있던 것은 체류비자 한 달이었다. 그들이 임대해 주었던 숙소는 두 달 정도 잔여기간이 있었다. 그러나 부엌이 없는 방이었다. L 목사님 교회에서 파송됐던 두 자매가 주고 간 50불로 바나나 튀김을 사서 겨우 허기를 면하고 있었다.

그즈음에 인천 인하대 교수로 계시던 K 안수집사님께서 격려의 편지와 함께 1,000 US 달러를 보내주셨다. 내 절박한 사정을 모르시는 분을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것이다. 그제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어떻게 비자를 연장해야 하는지 언어 훈련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삼 개월 비자를 다시 받기 위해서는 꽤 비싼 수수료와 함께 나의 신원을 보증해 줄 스폰서가 있었야 했다.

외국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비자 문제이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간 선교사들이 삼 개월 간격으로 국경을 옮겨 다닌다는 선교지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는 현지인이든 한국인이든 간에 비자 신원보증을 해줄 이가 전혀 없었다. 결국 사업을 하는 한국인의 도움으로 삼 개월 비자를 받게 되었지만 내가 있던 자바 서쪽 바튼주의 땅그랑에서 어떻게 자카르타 동부 깜뿡 람부탄에 거주하는 그분들을 만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있던 곳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20 – 30분 정도를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내려 또 걸어가야 했던 곳이다.

중년의 나이에 작열하는 태양을 이고 낯선 땅, 낯선 언어와 사람들 사이를 끌고 다니던 내 고독한 그림자가 지금도 언뜻 언뜻 보인다. 주님께서 이곳에서 부르신 일을 하려면 빨리 언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시 나는 인니어 인사말조차도 못했다. 언어 훈련을 위해서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으로 가야 했다. 학비는 학기당 1,000불로 3학기 수료를 요했다. 나에겐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10,000 US 달러를 보내주겠다는 분이 계셨다. 이것으로 언어훈련뿐 아니라 한인들 첫 예배처 임대, 1996년 5월에 있었던 김기동 감독님의 첫 집회를 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와 시무언과 함께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는 분이다. 그러나 이번 서울에서 돌아온 밤을 지낸 다음 아침 7 월 18일 그분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양원에서 아침식사 후에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낙심할 때가 많다. 서울에 갈 때마다 하루라도 그분을 뵙고 왔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번에는 가 뵙지 않았다. 나보다 더 고독했을 그분이 나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내가 돌아온 다음날 아침에 소천하셨으니 말이다.

사람은 은혜를 입기 싫어한다. 입었어도 잊고 싶어 한다. 잊지 않아도 억지로 기억하고 의무적으로 갚아버리려고 한다. 사람은 배은망덕하나 자애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일생 독신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섬겼던 그분을 기억하실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인색하고 조금씩 받은 용돈을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사셨던 그분을 기억하실 것이다. 특별히 전 재산과 다름없는 큰 헌신으로 우리 인니 베뢰아 성락교회의 기틀을 마련해 주신 그분을 위해 낙원의 문을 활짝 열어맞아 주셨을 것이다.

김주희 권사님이 아니었다면 우리 인도네시아 베뢰아 성락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2025년 7월 27일
담임 목사 고정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