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만 남은 몸으로 비틀비틀 기도실에 들어온 고양이가 새끼까지 네 마리를 낳아 함께 산 것이 한 일 년이 되어간다.
내 사무실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다. 비록 20년이 넘었지만 잘 써왔던 소파는 꼬마 호랑이들이 발톱을 가는 도구로 사용하여 너덜 너덜하다. 좋아하는 장난감이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 화장실은 깨끗한 모래를 수시로 갈아줘야 한다. 모래를 사 나르는 일도 작은 일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교회 식구들이 이 고양이 가족의 시종이 되었다. 총알처럼 날아다니고 점프하는 청소년기의 고양이들을 수종드는 것은 그들의 귀여움 때문에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내 방에는 사진 찍어 보여주고 싶을 만큼 천하태평인 고양이들의 잠자는 모습이 펼쳐져 있다. 배를 다 드러내놓고 앞다리 둘은 사람 아기의 팔처럼 올리고 두다리는 공격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듯 늘어뜨리고 잠자는 모습은 참 사랑스럽다.
미국에서 사형을 당하는 사람을 두고 아래와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사형수에게 교수형과 독사에게 물려 죽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단 독사는 맹독을 가지고 있어 물린 즉시 빨리 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독사를 택했고 물린 즉시 죽었다.
그런데 사실 독사는 없었고 눈이 가리어진 그는 독사가 가까이 오는 거 같이 연출된 소리를 들었고 오직 두 개의 일반 바늘에 찔렸을 뿐이었다. 그의 사체를 해부했을 때 의사들은 놀랬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독사의 맹독이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면역체계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온갖 부정적 호르몬이 분출되어 즉시 심장이 멈춘 것이다.
이 사례는 신념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한때 신념의 힘을 믿으라는 가르침이 교회 안까지 범람한 적이 있었다. 미국 로버츠 슐러 목사와 한국의 조용기 목사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눈을 응시하고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외치라고 했다. 실제로 어려움을 극복한 세일즈맨이나 사업가들의 사례가 교회에서 간증인냥 보고되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신념이나 말, 생각은 심장을 멈추게 하고 뛰게도 하고 물건을 많이 팔도록 용기도 주지만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하시며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영원한 법이며 하나님도 의지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세세토록 계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믿음이다.
예수께서
‘네 죄 다 사했으니 평안하라!
네 병 다 고쳤으니 평안하라!
네 가난과 저주 다 담당했으니 평안하라!’
하나님 말씀은 요새요, 강한 성이요, 방패요, 투구라고 성경 기자들도 고백하지만 그 말로도 부족하다. 우리가 받은 영원한 평안을 표현할 인간의 말이 없다.
믿는 자,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체까지 부어주시는 말씀의 평안과 생명과 자유를 아는 자가 참으로 믿는 자이다.
사랑스럽게 평안을 누리는 고양이를 보는 나는 종종 하나님의 시선을 느낀다.
‘네가 나를 믿어 평안하니 그 평안을 영원히 지켜주리라.’
2026년 1월 18일
담임 목사 고정금
